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글렌 (문단 편집) === 군 경력 === 대학생이던 글렌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에 복수하기 위해 대학을 자퇴하고 즉시 미 육군 항공대에 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비행단 지상근무요원은 아무런 전투임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육군 복무 중인 1942년 3월 그는 해군 항공 사관후보생 과정에 지원했다. 글렌은 1943년 3월 조종훈련 기본과정을 마치고 해병대 예비역[* 미국의 예비역은 우리 상근예비역과 유사하게 처음부터 바로 예비역으로 복무하는 파트타임 군인이다.]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에는 조종훈련 고등과정을 거쳐 제353해병공수비행대대(VMJ)에 배치되어 [[C-47|R4D]] 스카이트레인 공수기를 조종했다. 이후에는 제155해병관측비행대대(VMO)로 전근, [[F4F 와일드캣|F4F-3P 와일드캣]] 항공사진 정찰기 조종사로 근무하다가, 대대가 [[F4U 콜세어]] 전투기로 기종을 전환하고 해군 항모비행단으로 전속되는 바람에 전투조종사가 되었다. 그가 속한 155대대는 미 해병대 최초로 해군 항모비행단에 소속된 항모배치 해병비행대대이자 북태평양 지역의 유일한 해병비행대대가 되어, [[보그급 호위항공모함]] 11번함 USS 나사우(CVE-16)과 함께 에투섬 전투에 참가했다. 1943년 10월에 그는 해병대 중위로 진급했다. 1944년 1월 대대는 항모배속이 해제되어 하와이로 이동했고, 1944년 6월에는 [[마셜 제도]]에 있는 육상 비행기지로 재배치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57~59회에 달하는 전투임무를 수행하여 2개의 [[공군십자장]]과 10개의 항공수훈장을 받았다. 1945년에는 1년간의 의무 파병기간을 다 채워서 미 본토 부대인 제913해병전투비행대대(콜세어 대대)로 배치되었고,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1945년 7월에는 해병대 대위로 진급했다. 예비역이었던 그는 그때까지도 아직 해병대 현역으로 복무할 생각은 없었지만 현역 전환 자격시험을 준비하여, 1946년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전역했다. 1946년 중국에서 제2차 국공내전이 발생하자 그는 중국 파병에 지원하여 콜세어 비행대대인 제218해병전투비행대대와 함께 1946년 12월 베이징 난위안 공항에 배치되었다. 218대대는 1947년 3월까지 중국에서 항공초계 임무를 수행하다 전황이 악화되자 결국 괌으로 철수했고, 1948년 12월 그는 대대와 함께 미 본토로 귀국했다. 귀국한 그는 해군 비행교육대에서 비행교관으로 근무하다, 1951년 7월에는 6개월 과정의 해병대 상륙전 학교에 입교, 이후에는 해병학교 참모로 지상 근무를 했다. 이 기간에 그의 비행시간은 월 4시간에 불과했는데, 이것도 휴일인 주말비행을 통해서야 겨우 그의 조종자격과 비행수당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52년 7월 그는 해병대 소령으로 진급했다. 1952.10월 그는 6.25 전쟁 파병을 명령받았고, 1953년 2월 3일에 그는 포항공항에 도착하여, 미 해병대 제33해병비행전대 311해병공격비행대대 작전장교로 근무를 시작했다. [[F9F 팬서]] 전투공격기로 구성된 311대대는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1953년 2월 26일 항공정찰 임무를 시작으로 한국에서 첫비행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에서 63회의 전투임무를 수행했는데, 한국에서 그는 자석 엉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별명은 그가 지나치게 낮은 고도로 근접항공지원(CAS)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그의 전투기가 적군의 대공포 화력을 끌어 모은다 하여 생긴 별명이다. 그는 두번이나 자신의 전투기에 250개 이상의 대공포 피탄 구멍을 만들어 기지로 복귀한 전력이 있었다. 또, 그는 미국 메이저리스 보스턴 레드삭스 팀의 프로야구 선수이자 미 해병대 상근예비역 전투조종사로 같은 대대에 근무하고 있던 [[테드 윌리엄스]] 해병대 대위의 윙맨으로 잠시 함께 비행을 하기도 했고, 나중에 해병대 소장까지 진급한 [[https://en.wikipedia.org/wiki/Ralph_H._Spanjer|랄프 스팬저]]와 함께 비행을 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오기전 그는 각 군간 상호 인적교류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F-86]] 세이버 전투기 조종교육을 받았고, 한국에 주둔한 미 공군 제51전투요격 비행단 25전투요격 비행대대에서 [[F-86]]F 세이버 전투기 조종사로 잠시 근무한 적도 있다. 그는 미 공군 25대대에서 [[F-86]]으로 27회의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1953년 7월 12일 그는 공군 세이버 전투기를 타고 [[MiG-15]] 전투기를 처음으로 격추했고, 7월 19일에 또 한 기, 7월 22일에도 또 한 기를 격추했다. 세이버 전투기로 단지 4번의 공중전을 통해 3기의 [[MiG-15|미그기]]를 격추했지만 안타깝게도 곧 전쟁이 끝나버렸기 때문에 기록은 여기서 멈추고 만다. 6.25 전쟁에서 그는 2개의 항공수훈십자훈장과 8개의 항공수훈장을 받았다. 한국에서 그는 미 해군 [[시험비행 조종사]] 과정에 지원하여, 1954년 1월 미 해군 [[테스트 파일럿 스쿨]]에 입교했고, 54년 7월에 졸업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나중에 [[명예 훈장]] 수훈자가 된 [[제임스 스톡데일]]에게 물리학과 수학 강의를 들었다. [[시험비행 조종사]]로 그가 처음 시험한 항공기는 [[F-86]] 세이버 전투기의 해군형인 [[https://en.wikipedia.org/wiki/North_American_FJ-2/-3_Fury|FJ-3 퓨리]] 전투기였는데, 이 시험비행에서 그는 조종석 압력 계통과 산소공급 시스템 고장으로 거의 죽을뻔 했다. 또한 그는 [[https://en.wikipedia.org/wiki/Vought_F7U_Cutlass|F7U 커틀래스]] 전폭기와 [[https://en.wikipedia.org/wiki/Vought_F-8_Crusader|F8U 크루세이더]] 전폭기의 무장 체계를 시험했다. 1956년 11월~1959년 4월 사이에는 [[메릴랜드 대학교]]에 파견되어 신형 전투기 설계를 지원했다. 1957년 7월 16일 그는 미국 최초의 초음속 대륙횡단 기록을 세웠다. 그 전까지는 미 공군 [[F-84 썬더제트]] 전투기가 세운 3시간 45분이 최고 기록이었지만, 글렌은 해군용 [[https://en.wikipedia.org/wiki/Vought_F-8_Crusader|F8U 크루세이더]] 전폭기로 그 기록을 3시간 23분으로 단축했다. 이 공로는 그는 5번째 항공수훈십자훈장을 받았고, 1959.4.1일에는 해병대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때 그는 거의 9,000시간의 비행시간을 가지고 있었고, 이중 3,000시간은 제트기 비행시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